-
목차
나는 조향사다. 그리고 매번 향료를 고를 때마다 떨린다.
향을 만든다는 건 단지 좋은 냄새를 조합하는 일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감정을 공간에 띄우는 일이고,
향료는 그 감정을 전달할 재료다.내가 어떤 향수 하나를 디자인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건
향료의 목록을 펼쳐보는 게 아니라,
그 향수가 어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을 담아야 하는지를 정리하는 것이다.그리고 향료 배합의 모든 비밀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향료 배합은 공식이 아니다. 감정과 기억의 레이어다.
사람들은 종종 “이 향수엔 어떤 향료가 들어갔어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향료는 정답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그 향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느냐죠.”향료를 배합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른다.
1. 기억을 떠올린다
→ 이 향수가 담아야 할 순간은 무엇인가?
→ 아침 햇살인가? 연인의 품인가? 낯선 거리의 차가운 공기인가?2. 감정의 결을 정한다
→ 그 순간은 부드러운가, 날카로운가, 따뜻한가, 공허한가?
3. 향료를 배치한다
→ 구조적으로 탑–하트–베이스로 향료를 배열하지만,
→ 그 핵심은 ‘감정이 흘러가듯 연결되는 레이어’를 만들 수 있는가다.
배합의 실전 비밀 몇 가지
내가 향수를 만들면서 터득한 향료 배합의 비밀은 단순한 조합이 아니다.
그건 아래처럼 감정 기반 구조와 시퀀스를 얼마나 정교하게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감정이 있는 탑노트는 시트러스만으론 부족하다
- 레몬, 베르가못만 넣으면 청량하지만 비어 보인다
- 거기에 핑크페퍼를 섞으면 감정의 긴장감이 생긴다
→ "상쾌함 + 살짝의 자극" = 기대감을 주는 도입
▸ 하트노트는 ‘감정의 심장’이다
- 자스민, 아이리스, 튜베로즈는 각각 다른 감정의 무게를 가진다
- 같은 플로럴 계열이어도 배합 순서와 비율이 달라지면
→ 전혀 다른 심리가 전달된다
▸ 베이스노트는 향의 인격이다
- 샌달우드, 머스크, 바닐라, 앰버
→ 이 네 가지를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 향수가 ‘섬세한 사람’인지, ‘관능적인 사람’인지, ‘신뢰 가는 사람’인지가 정해진다
내가 설계했던 잊히지 않는 배합
한 번은 이런 주문이 들어왔다.
“이별 직후의 고요함, 그리고 회복 직전의 따뜻함”을 담은 향수.당연히 플로럴이나 시트러스는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배합했다:노트향료 구성배합의 이유탑노트 클라리세이지 + 시트론 선명하지만 고요한 머릿속 느낌 하트노트 아이리스 + 자스민 삼박 잔잔하지만 심오한 감정 레이어 베이스노트 샌달우드 + 앰버 + 화이트 머스크 감정을 덮어주는 잔향의 여운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고객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향기가 아니라 한 편의 회복기예요.”
향료 배합이 인상에 미치는 영향
향수의 향료 구조는 사람의 인상에 그대로 영향을 준다.
내가 설계하는 모든 배합의 목표는 단 하나다:“이 사람은 어떤 사람처럼 느껴져야 하는가?”
향료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을 전달하는 언어가 된다.
향료 배합의 진짜 비밀은 공식이 아니라 ‘감정 흐름’이다
사람들은 향수 병 안에 들어 있는 걸 향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 향료라는 도구를 통해 만들어진
감정의 설계물이다.그 배합에는 수학도, 화학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향이 어떤 감정을 건드릴 것인가를 정확히 설계하는 직관이다.그리고 향수 디자이너는
그 감정을 말이 아닌 향으로 말하는 사람이다.